'방향 더듬이'를 정하는 일
월간 목회 기고글
방향 더듬이를 세우는 일
— 목회 계획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한 해의 방향을 세우는 일이다
모든 교회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안고 저마다의 비전 선언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르신 이가 주님이시기에 교회마다 비전과 미션은 대동소이합니다. 그러나 매년 무엇을 강조할 것인가는 목회자의 철학과 은사에 따라 달라지고, 그 강조점을 담은 교회 표어가 그해 교회가 지향하는 방향을 정합니다. 그리고 그 방향에 따라 사역자 배치 및 충원, 시설 확충 및 예산 편성까지 달라집니다. 이민교회에서 영어권 회중과 함께 목회해 온 저의 경험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한 해의 목회를 준비하면서 제가 가장 먼저 고민하는 것은 교회 표어, 곧 '방향 더듬이'를 세우는 일입니다. 더듬이가 앞을 더듬어 길을 찾듯이, 우리 교회가 한 해 동안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먼저 더듬어 찾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교회에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가'를 계속 묵상하며 스스로 묻습니다. 다음 해를 위한 목회 계획은 6개월 전, 모든 풀타임 사역자가 모이는 전략회의에서 시작됩니다. 담임목사의 구상이 그 자리에서 제시되고, 가장 적절한 교회 표어를 놓고 함께 고민합니다.
전략회의에서는 새로운 프로그램과 새로운 사역부터 고민하기 쉽지만, 먼저 필요한 것은 강조해야 할 사역의 방향입니다. 배가 아무리 좋은 엔진을 가지고 있어도 방향이 잘못되어 있으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저는 매년 목회 주제와 표어를 정하는 일을 단순한 슬로건 만들기가 아니라, 우리 교회가 한 해 동안 함께 바라볼 영적 방향을 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 표어는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
저는 목회 표어를 정할 때 세 가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첫째는 말씀입니다. 그 해에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특별히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목회자의 개인적인 아이디어나 시대의 유행보다 말씀이 먼저 와야 합니다. 이렇게 받은 말씀을 따라 연초 두 달 정도의 주일 메시지를 미리 준비합니다. 저희 베델교회는 신년 특별새벽기도회(엘리야특별새벽기도회)로 한 해의 첫 주에 주님께 나아갑니다. 그때 담임목사로서 한 해의 사역 방향을 선포하고, 주님이 주신 메시지를 나누며 한 해를 시작합니다.
둘째는 교회의 형편입니다. 지금 우리 성도들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살핍니다. 위로가 필요한 때인지, 다시 일어서야 할 때인지, 선교적으로 밖을 향해야 할 때인지, 다음 세대를 세워야 할 때인지, 아니면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때인지를 봅니다. 물론 이 모든 사역을 동시에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시대적 요청이 분명할 때는 그것을 교회의 비전으로 삼아 추진합니다.
셋째는 시대의 질문입니다. 교회는 시대와 동떨어진 섬일 수 없습니다. 세상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다음 세대가 무엇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있는지, 우리 성도들이 일터와 가정에서 어떤 질문을 안고 살아가는지를 들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만나는 지점에서 그 해의 목회 주제가 태어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팬데믹을 지나며 캘리포니아 공립학교 교육에 대한 학부모들의 우려가 커졌을 때가 그러했습니다. 기독교 교육의 필요를 절감하며 다음 세대를 향한 거룩한 부담을 지고 기독교 고전교육 사립학교(Bethel Classical Academy)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시대의 질문과 교회의 형편과 말씀이 한 지점에서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 표어를 억지로 '만든다'기보다, 기도와 말씀, 그리고 목회 현장을 오래 바라보면서 사역자들과 함께 '발견한다'는 표현을 더 좋아합니다.
2. 교회 표어가 성도의 언어가 되도록
교회 표어가 단순히 주보 표지에만 남아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의 대화 속에 자연스럽게 나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표어는 단순해야 하고, 가능하면 영어권 회중도 같이 외칠 수 있도록 영어와 함께 구호로 만들 수 있는 표어를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매년 교회 표어로 주제곡을 만듭니다. 매주일 예배를 마무리하면서 온 회중이 함께 부르며 한 해의 목표를 늘 묵상하고 다짐합니다.
제가 중요하게 생각해 온 것은 한 해의 주제가 설교에서 교육으로, 교육에서 행사로, 행사에서 조직과 사역으로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주일 강단에서 반복해서 그 방향을 설명하고, 교육부서와 소그룹에서도 같은 정신을 나누며, 선교와 구제, 다음 세대와 각종 행사까지 가능한 한 하나의 방향으로 연결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목회의 '정렬(alignment)'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2024년 표어가 “Mighty God, Mighty Prayer”였을 때, 교회학교는 수양회와 행사에서 교회 표어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단어만 바꾸어 사용했습니다. 단기선교팀이 파송될 때에도 “Mighty God, Mighty Mission”을 그해 선교 운동의 표어로 삼았습니다. 이처럼 교회 표어는 또 하나의 일을 더하지 않습니다. 이미 하고 있는 교회의 많은 사역을 한 방향으로 정렬시키면서 온 교회가 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교회 표어가 꼭 있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없어도 교회이고, 있어도 교회입니다. 그러나 한 해를 시작하며 교회 표어를 발표했을 때, 젊은 성도들이 찾아와 “이제 우리 교회가 어디로 가는지 알겠습니다. 표어 때문에 우리 마음이 안정감을 갖습니다” 했던 말을 잊지 못합니다. 함께 배를 타고 가는 승객들이 배가 가는 방향과 목적지를 알고 가듯이, 교회 표어는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같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데 주효하다고 믿습니다.
3. 표어가 만들어 낸 이야기들
돌이켜 보면 목회하면서 수많은 주제를 내걸었습니다. 2013년 “어제의 축복, 내일의 사명”은 리더십이 바뀌던 해였고, 2017년 “하나님께 뛰어들어라 Dive into God”은 선교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2019년 “영광의 비상 Bound for Glory”는 고난을 넘어 영광으로 나아가던 해였고, 2023년 “Always Be There”는 사역에 헌신을 다짐한 해였습니다. 2025년 “여전히 Jesus Alone”은 복음의 정체성을 붙든 해였습니다. 해마다 그렇게 방향 더듬이를 세우며 해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제게 오래 남는 것은 멋있었던 문구 자체가 아닙니다. 그 말씀 때문에 움직였던 성도들의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듣고 오랫동안 미루었던 순종을 시작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선교에 마음을 열고 한 가정 전체가 선교에 동참하면서 회복된 가정이 있었습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내어놓은 성도가 있었고, 어려운 이웃을 품기 시작한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 “목회 계획이라는 것이 결국 이런 열매를 위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별히 베델교회가 올해 50주년을 맞으면서 우리는 “Come & See 50”이라는 주제를 붙들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또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건넨 “와서 보라”(요 1:39, 46)는 초대를 50주년의 언어로 삼은 것입니다.
50주년은 자칫하면 과거를 자랑하는 행사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희년은 다시 자유를 선포하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며, 새로운 미래를 시작하는 사건입니다. 그 정신을 따라 우리에게 50주년은 “우리가 지난 50년 동안 무엇을 이루었는가”를 자랑하는 시간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50년 동안 무엇을 하셨으며, 이제 우리를 어디로 보내시는가”를 묻는 시간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 정신을 예배와 설교에만 담지 않았습니다. 선교 컨퍼런스, 다음 세대 사역, 장애 아동 체임버 오케스트라, 청소년을 섬기는 사역, 교회 역사의 기록과 출판까지 가능한 한 희년의 정신으로 연결하려고 했습니다. 선교사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헌신을 기억하는 일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4. 복음은 새로울 필요가 없다
매년 새로운 목회 주제와 표어를 정하는 것은 사실 목회자에게 부담이 됩니다.
오랫동안 목회하다 보면 “작년보다 더 새로운 말을 해야 한다”, “성도들에게 또 다른 비전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교회가 커질수록 그 부담은 더 커집니다. 많은 사람이 목회자의 한마디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새로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 앞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목회자의 임무는 매년 새로운 복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복음을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다시 들리게 하는 것입니다. 표어가 새로운 복음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올해 우리 교회가 변함없는 복음의 어느 부분을 다시 들어야 하는지를 가리켜 줄 뿐입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올해는 무엇을 새롭게 할까?”보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복음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더 많이 묻게 됩니다.
교회는 이벤트 때문에 살아나지 않습니다. 말씀 때문에 살아납니다. 목회자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변화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다시 바라볼 때 변화됩니다.
모든 목회 계획은 한곳으로 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분명하게 보고, 더 깊이 사랑하고, 그분을 닮아가며, 세상 속에서 그분을 드러내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은퇴를 앞두고 지난 목회의 여정을 돌아보면서 제 나름대로 목회를 이렇게 정리해 봅니다. 목회의 열매는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가 아니라 “내가 떠난 뒤에도 무엇이 계속되고 있는가”로 평가될 것입니다. 매해 목회 계획을 세우면서 저는 늘 한 가지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행사가 성공했는가, 예산을 잘 집행했는가, 출석이 늘었는가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성도들이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말씀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이웃의 아픔을 더 볼 수 있게 되었는가?
다음 세대를 더 품게 되었는가?
그리고 교회 안에 안주하지 않고 세상으로 전도하러 나가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그해의 목회는 주님이 기뻐하신 목회였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미래는 우리가 만들지 않습니다.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당신의 교회를 세워 가십니다. 우리는 해마다 더듬이를 세워 그분이 이끄시는 방향을 따라갈 뿐입니다.

